미국 이론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끈 '맨해튼 프로젝트'는 전 세계 안보 지형을 바꾼 사건이자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동력원을 인류에게 선사한 계기였다. 인류가 원자 세계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전 세계는 '핵 억지력'에 기반한 새로운 냉전 체제와 안보 지형을 마주하게 됐다. 동시에 고질적인 에너지 결핍을 해결할 열쇠도 찾았다.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핵분열 기술이 이후 원자력 발전으로 이어지면서다.
원자력 발전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 이념 진영이 충돌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어서다.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손자 찰스 오펜하이머가 미국 원전 시장을 재부흥하기 위해 전면에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우연이라 하기 어렵다.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커리어를 쌓은 그는 2023년 스타트업 '오펜하이머에너지벤처스'를 설립했다.'비즈니스적인 수단을 활용해 핵무기와 기후변화라는 실존적 위기에 대응하겠다'는 기치 아래 미국 내 원전 개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한국 투자자와 만나기 위해 최근 방한한 그를 지난 22일 매일경제가 만났다.오펜하이머 대표는 미국 내 원전 시장 분위기가 지난해 5월을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자력 발전 안전 규제를 완화하는 4개 행정명령을 선언하면서다. 이로써 향후 미국 시장에서는 대형 원전이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그럼에도 미국에서 원전 건설은 여전히 힘들다. 원전 건설 사업에 투자될 자금을 모으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전력 시장에서는 보통 전력 구매자인 민간 유틸리티 기업들이 발전 프로젝트 자금을 조달한다. 발전소 건설이 늦어져서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거나 전력 가격이 갑자기 떨어지면 부담을 온전히 투자자가 지게 된다.프로젝트 부담을 여러 이해관계자가 나눠 질 수 있는 구조를 짜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오펜하이머 대표는 "전력회사가 프로젝트의 유일한 구매자나 위험 부담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개발사가 프로젝트를 먼저 시작한 뒤 전문가들인 한국의 투자자, 설계·조달·시공(EPC) 기업, 그리고 수요자인 테크 기업(수요자)과 전력회사를 모아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드는 것이 해법"이라고 말했다. 그가 설립한 오펜하이머에너지벤처스는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 개발을 담당하게 된다.
미국 원전 시장의 부흥은 한국에도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오펜하이머 대표는 "한국은 원전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평판을 가지고 있다"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전 건설 비용을 낮췄으며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출했다"고 말했다.구체적으로 원전 프로젝트의 재무적투자자(FI)가 되거나 EPC 공급 기업으로 참여해 EPC 역량을 미국에서 키우는 방법, 원전 내 기기를 공급하는 방식 등을 언급했다.25년간 기술과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방식을 원자력 에너지 시장에 적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그의 할아버지처럼 인류를 다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펜하이머 대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 즉 아무도 원전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고 싶다"며 "원자력 에너지가 인류에 평화와 풍요를 줄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철학이 말 그대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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